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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백만장자 신화, “아직도 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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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백만장자 신화, “아직도 회자”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1.25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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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왕(米豆王) 반복창의 인생유전

조선경제력 30%차지 인천 미두부 좌지우지
당대 최고 미녀 김후동과 화려한 결혼 화제
40세의 초라한 최후 ‘흥망성쇠’ 상징 인물로

‘미두(米豆)왕’ 반복창과 ‘원동(원서동) 큰 재킷’ 김후동의 결혼식은 오전 11시30분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거행됐다. 요시마쓰 인천 부윤(지금의 인천시장)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반복창의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원 (현재가치 30억원)에 달했다. 이날 반복창의 결혼식은 20여 년 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호화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삼천리’ 1939년 1월호에는 ‘장안 재자가인, 영화와 흥망기’라는 제목으로 가상의 대화가 실려있다.

김팔연 : “서울서 결혼식을 호화롭게 한 이가 누구일까?”

복혜숙 : “반복창일걸. 본명보다 반지로(潘次郞)라는 일본 이름이 더 유명하지요. 미두를 해서 30만원인가 하는 거금을 벌었는데 부자가 되고나서 처음 한 일이 큰집 짓고 좋은 색시 얻어서 장가든 것이었어요. 인천 해안에다가 아방궁 같은 큰집을 짓고 신부를 골랐는데 인천이 좁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학교를 죄다 뒤졌거든. 그중에서 경성여자고보에 다니는 김후동이란 처녀를 골랐다는구만. 김후동이가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원동 재킷’의 언니였지요. 나도 보았는데 얼굴이 그냥 꽃이에요. 참말 미인이거든.”

이서구 : “그렇지. 나도 보았는데 선녀 같았어요. 그 여자가 조선서 처음으로 치마 끄트머리에 수를 놓아 입었지. 그 여자가 시작이었어. 김후동은 바이올린도 잘했지. 반복창의 결혼식은 인천서 신사 다수를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거행했는데 인천부윤이 축사도 하고 떠들썩했었지.”

<1921년 5월,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린 반복창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10월 인천 송림리(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불혹의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이 죽은 날은 마침 인천 미두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미두로 흥망성세를 다 맛본 풍운아 반복창이가 미두시장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사십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 인천 경제력의 30%나 차지하던 조선취인소 인천미두부는 청산시장(淸算市場, 폐업을 앞둔 시장)으로서 앞으로 십여 일만 지나면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다.

인천에 미두시장이 생긴 이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미두왕으로 한때 그 이름을 떨친 반지로도 사십 평생을 미두시장과 떨어지지 못하더니 미두시장의 조종과 함께 지난 18일 오전 8시 세상을 떠났다.

반지로는 오십만 원이란 거대한 돈을 미두시장의 방망이 소리 한 번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또 한 번의 방망이 소리에 오십만 원은 간 곳이 없어지자 정신병에 걸려 이십년 동안이나 신음을 하면서도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며칠 전까지도 미두시장을 기웃거렸다.

반지로가 미두시장과 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와 미두시장과의 인연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된 셈이다.> (‘취인소와 함께 사라진 인천의 반지로’, ‘조선일보’ 1939년 10월23일자)

반복창은 일제시대에 ‘자수성가’ 로 갑부가 됐던 인물로, 그 때문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파산했고, 결국에는 그 자신도 패가망신한 인물이다. 일제시대 미두시장(지금의 주식시장에 해당)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인물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아전의 자식으로 태어난 반복창은 인천 미두시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는데, 아라키는 반복창의 능력을 인정하고 ‘반지로’ 라는 일본이름을 지어 줬다.

1919년 아라키가 인천미두시장에서 거액을 챙긴 후 일본으로 도망가자, 한 때 미두시장은 문을 닫았고, 조선에서 쌀을 싼값으로 가져가야 했기에 총독부가 나서서 다시 시장을 열었다.

이 때에 적은 자본밖에 없었던 반복창도 아라키의 하수인 노릇하며 미두시장에서 왔다 갔다 하던 경험을 살려 미두장에 뛰어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반복창이 찍는 대로 미두시세가 움직이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다.

<‘칼 물고 뜀뛰기’ 하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투기장에서 반복창은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어갔다. 한 섬에 55원씩 1만섬을 사서 73원씩에 팔아 한 번 거래로 18만원을 벌기도 했다.

마치 귀신이 붙은 것처럼 맞추기를 몇 달. 반복창의 재산은 어느덧 40만원으로 불어났다. 한 달 월급이 5~6원에 불과하던 요비코가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천지가 온통 반복창 이야기로 들끓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의 신의 조화라. 반지로는 이상하게도 팔아도 먹고 사도 먹고 거짓말같이 시세를 잘 맞췄다.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그가 출입하는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선은행 인천지점에는 각각 20만원씩 거금이 예금되었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매일 30~40명에 달해 그를 미두신(米豆神)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 강화도에 가 산도 사고 전답도 사며 인천 부도정(敷島町·지금의 중구 선화동)에 있는 일본인 창기도 조건 없이 여덟 명이나 속신(贖身·양민으로 만듦)시켜 주었다.> (‘나르는 새도 못 따르던 지난날의 반지로’, ‘매일신보’ 1930년 2월15일자)

겨우 1년 반 만에, 반복창은 40만원의 재산을 소유하게 됐다. 지금 현금으로 치면 약 4백억 원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빈약한 경제체제를 놓고 보면, 거의 4천억 원의 가치라고 보면 될 듯하다.

반복창이 빈털터리에서 거부가 됐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미두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수도 없는 사람들이 파산에 이르렀다.

이러는 동안, 반복창은 당시 최고의 미인 김후동과 호화스런 결혼식을 올리고, 인천에 대저택을 짓는 등의 초호화생활을 하며, 총독부 거물들과 당시 인천에 있던 일본 관리들을 태우기 위해 기차를 통째로 대절하는,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도 벌였다. 그러나 독립자금은 커녕, 교육이나 기타 좋은 일에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1922년부터 갑자기 찍는 시세마다 빗나가기 시작해, 불과 수 년 만에 전 재산이 날아가고, 가정도 깨지고 짓던 저택도 사라졌으며, 이후에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등 몰락일로로 나아가다가, 정신까지 이상해져 1939년 죽어버리고 만다. 그가 죽던 해에 인천 미두시장도 문을 닫아 반복창은 미두 시장의 흥망성쇠로 여겨지는 것이다.

반복창은 자신이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을 미두시장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잘나서 거부가 된 줄 알고 총독부 관리들에게 으시댔는데, 그들이 반복창의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참지 못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두시장을 움직이는 것도 총독부이고, 시세를 결정하는 곳도 인천이 아닌 일본 본토 오사카의 시장이었다. 반복창은 대국을 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승부는 오사카에서 난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자신이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반복창을 ‘미두신’ 이라고까지 부르면서 밀어줬던 일본인들은, 미두시장에 돈을 쏟아 붓는 조선인들 덕분에 반복창이 가져갔던 돈의 몇 배를 뽑아냈으며, 마지막에는 반복창의 돈까지 다 가져갔으니, 꿩 먹고 알 먹은 꼴이 됐다.

이후에도, 금광소동, 부동산소동 등으로 일제시대에 수많은 투기들이 있었고, 이 때 마다 한두 사람은 거부가 되고 나머지는 거기 투자했다가 쪽박 차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반복창의 몰락은 당시 신문에도 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지만 이에 아랑곳 할 것 없이 당시 사람들은 누가 대박을 쳤다는 소리만 나오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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