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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과 배짱 맞는 최측근 정치인중 노래실력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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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과 배짱 맞는 최측근 정치인중 노래실력도 최고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14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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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정두언

정치인 되기전 고시합격해 공직생활
2000년 총선나가 낙선 최대의 시련
2002년 서울시장 선거때 MB와 인연
시장 선거하며 환상 조합으로 맺어져

공직생활 절망감 느껴 영화배우 되기로 결심
KBS주연급 배우모집에 공모 4단계까지 통과
부모-아내의 눈물겨운 협박으로 꿈 접기도
2000년 이회창씨 권유로 정치에 첫발디뎌
음반 3장 내고 가수협회 등록된 정식가수

지난 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정두언 의원(이하 ‘정두언’)을 청와대로 불러 관저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 대통령이 정두언을 만난 사실만으로 한나라당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정두언은 이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정두언은 최근 국무위원 인사파동 등으로 동요하고 있는 민심을 전하며 개혁공천의 필요성을 진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통합민주당의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단행한 것과 같은 강도 높은 개혁공천을 하지 않을 경우 4월 총선 때 수도권 등지에서 고전할 것이란 우려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두언은 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통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나왔다. 지금은 정권의 실세 중 실세지만 이 대통령을 만나기 전까지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정두언은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행정관료였고 그 전에는 가수와 연기자 지망생이기도 했다. 지금도 정두언의 휴대폰에서는 상업성에 물들지 않은 싱싱한 목소리의 노래가 컬러링으로 들린다. ‘가수 정두언’의 목소리다. 정두언은 가수협회에 등록된 직업 가수이기도 하다. 음반을 석 장이나 냈다.

정두언의 연예인적 기질이 이 대통령에게 어필한 것인지도 모른다. 건설회사 회장 출신이고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 도장을 찍지 않는 이 대통령으로서는 책상에 앉아 서류로만 일하는 공무원들은 달갑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공직 생활 경험이 일천하던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시절 정두언을 만난 것은 ‘찰떡 궁합’의 시작이었던 듯하다.

정두언은 이 대통령을 만나기 전 국무총리실 비서관을 그만두고 2000년 총선에 나갔다 낙선해 화려하지 못했던 공직생활에 이어 낙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그가 이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을 행운이었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이 대통령을 만나자 선거시작부터 두 사람은 일심동체가 됐다. 정통 행정관료 출신과 대기업경영인출신의 만남은 너무나 잘 맞는 환상의 조화였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은 절대로 맞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 전 시장은 노가다 기질이 철저하게 몸에 밴 사람이다.

현장 노동을 단순한 직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노가다판’ 만큼 정확성과 현실성, 오직 확인, 현장중심성이 강한 곳이 없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현장 확인 아니면 절대로 도장을 찍지 않는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알고 보면 정두언과 이 대통령은 서로의 취약점을 꼭 알맞게 메워 주는 상호 상승 관계였던 것이다.

정두언과 이 대통령은 ‘근본’부터가 닮은꼴이다. 이 대통령이 자신을 키운 것은 가난과 어머니라고 말했듯 정두언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억척같은 어머니로부터 삶의 진지함을 배운 것 같다.

정두언은 1957년 지금은 청와대 춘추관이 들어선 종로구 삼청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만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광복 후 고향인 전남 광주로 돌아왔다.

그의 부모님은 결혼 후 무작정 상경하다시피 서울로 올라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도로 공사장 잡부 일 등 별의별 일을 다 해 가며 서울에 정착했고,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던 사촌 형의 운전기사로 들어가면서 삼청동에 살게 됐다.

신촌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서 당구장을 하며 살게 됐는데 그 덕분에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 당구 실력이 200에 도달, 혼자 온 손님의 파트너를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중반쯤에 중학교 무시험 발표가 났는데 전교 석차 1, 2위를 하며 경기 중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던 정두언은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 이 발표가 그리 섭섭하지 않게 생각됐다.

추첨으로 배문 중학교에 들어가, 팝송을 무지하게 많이 불렀다. 지금도 당시 유행하던 팝송의 가사를 다 외우고 있다. 정규음반 3집까지 낸 현역가수 정두언의 노래 인생은 이미 중학교 시절에 시작된 것이다.

정두언은 중학교를 전교 3등으로 졸업하고 시험을 쳐 경기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장안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 들어가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기를 펴기가 힘들었다.

입학 초기에는 쟁쟁한 집안 출신들에게 기가 죽어 1학년 내내 건달노릇을 하며 지냈고, 2학년 때는 그룹 사운드들과 어울리며 돌아다녔다. 3학년 때도 응원단장 한다고 춤 배우러 다니다가 결국 서울대 입시에서 낙방했고 재수 끝에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4학년이 되자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정두언은 사기업체는 어느 개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 결국 고시를 보는 길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막상 공부란 걸 해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고시공부를 시작한 이듬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정두언은 1981년 정무 제2장관실로 첫 발령을 받았다. 경제를 전공했기에 남들도 좋다고 하는 경제부처에 가고 싶었는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지원순위에서 밀리는 군사문화의 잔재 때문이었다.

그나마 정무 제2장관실은 당시 2인자 소리를 듣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관이었던 탓에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단 한 자리만 뽑는 것이어서 동기들은 지원을 망설였다. 정두언은 아무 생각 없이 배짱으로 밀어붙였는데 결국 혼자만 지원했기에 무혈입성 했다. 그러나 이것이 평범하지 않은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단초였다.

당시 정무장관실은 직원이 30명도 안 되는 작은 조직이었는데 정두언은 거기서 주로 복사, 팩스 보내기, 회의 준비를 위한 의자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고시에 합격한 서울대 출신으로 공직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공직생활을 끝낼 때까지 정두언은 관료로서는 중요한 직책에 앉지 못했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체육부가 신설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체육부 장관이 됐다. 이에 따라 정무 제2장관실은 없어지고 모든 직원이 체육부로 옮겨가게 되면서, 정두언은 어느 신문사 체육부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짜증났다고 한다.

체육부에 있는 동안 입대 영장이 나와 네 살 아래 친동생과 같은 날 같은 논산훈련소에 입대했고 제대 후 국무총리실 청소년 대책반에 복귀했다. 1987년 4.13호헌 조치가 내려지자 정두언은 공직자로서 절망감을 느껴 사표를 낼까 고심하다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침 KBS에서 기획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를 공모하겠다는 공고가 나와 1주일 휴가를 내고 응시했다. 서류 전형, 면접, 카메라 테스트, 연기 테스트, 최종 면접 순의 전형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 명을 제치고 4단계까지 통과했다.

정두언이 최종 면접을 남겨둔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니, 온 가족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로부터 그의 탈선에 대한 제보를 받은 아내가 친가와 처가 부모들을 모시고 농성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양가 부모들의 집요한 설득과 아내의 눈물겨운 협박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정두언은 그 때 자신이 탤런트가 됐다면 좀 더 일찍 국회의원이 됐을 것이라며 안타깝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우의 꿈이 좌절된 후 정두언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 노릇을 3년 가까이 하다가 보스가 사무실에서 순직하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미국으로 2년 기간의 연수를 가게 돼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대학에서 정책학 석사를 땄다.

정두언에게 미국에서의 2년은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다. 고시 공부할 때 이상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여행도 많이 했으며, 가족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복귀해, 교통업무와 정책업무를 맡아보다가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기게 됐다. 이후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을 하다가 2000년 초에 퇴직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지난 4·13 총선 직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공직사퇴 시한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표를 내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몇 달만 더 있으면 연금 대상자가 될 수 있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한 달 반 정도의 선거운동 끝에 전 산자부 장관 장재식 의원에게 2000여 표 차이로 졌다. 정두언에게는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2002년 이 대통령을 만나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전격 발탁됐고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아직도 초선의원이지만 신중함에 있어서는 재선 이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정두언은 자타 공히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이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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