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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당권 넘어 차기대권 꿈 무르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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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당권 넘어 차기대권 꿈 무르익는다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4.30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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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의원 정몽준

현대가 8명 아들중 여섯째 태어나
공부 잘해 鄭명예회장에 사랑받아

32세때 현대重 사장으로 파격발탁
울산에서만 5선 국회의원 저력과시
18대 총선서 동작을서 정동영 꺾어

1982년은 정몽준이 현대가의 아들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해다. 그의 나이 32세 때다.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날 현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크고,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 사장에 그를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고 정 명예회장의 8명의 아들 중 여섯째인 정몽준이 형들을 제치고 아버지로부터 가장 먼저 인정받은 것이다. 고 정 명예회장은 살아생전에 “몽준이가 우리 집안에서는 공부를 제일 잘 한다”고 자랑하곤 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창립 25주년 행사에서 정몽준을 젊은 나이에 현대중공업 사장에 앉힌 배경을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저서 ‘기업경영이념’을 읽어보면 우리나라의 어떤 젊은 경영진보다 확실히, 모든 것을 잘 분별해서 회사를 끌고 나갈 겁니다. 우리 아이들 간에도 서열이 굉장히 낮기 때문에 가족회의를 열어 몽준 사장이 충분히 직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이에 앞서 정몽준이 미국 MIT대학 석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경영서적 ‘기업경영이념’ 서문을 읽고 “정말 잘 썼다”며 “사장 자리에 앉아도 될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몽준은 훗날 가장 아끼는 그의 저서로 ‘기업경영이념’을 꼽으면서 “서문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부친에게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던 점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정몽준이 아버지로부터 현대중공업의 사장으로 발탁된 것만큼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극적인 시점에 놓여 있다. 울산에서만 5선 국회의원을 지내다 18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에서 당선됐다.

통합민주당의 대주주이며 상징적 정치인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돼 이번 총선의 최대 승리자라는 평을 받는다. 정 전 장관은 총선 운동기간 중 정몽준을 아버지 덕에 성공한 ‘부잣집 아들’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정몽준은 스스로를 다르게 말하는 것 같다. 

현대가의 여섯 번째 아들. 5선의 중진 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자산규모 재계 9위인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지분 10.80%). 국내 재벌가에서 정몽준 만큼이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도 드물다. 일각에서는 “잘난 집안에 태어나 순탄하게 성장한 대가”라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정몽준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생모와 관련해 여러 설들이 있지만 그의 죽마고우인 주수암씨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변중석 여사가 돌 지난 몽준이를 등에 업은 빛바랜 사진을 친구들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진으로 볼 때 변 여사가 몽준이의 생모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정 의원은 (생모에 대해)때가 되면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부산에서 3년가량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장충초등학교와 중앙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그는 초·중학교 시절 놀기를 좋아하고,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운동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곤했는데 친구들은 운동할 때의 정몽준을 “매서운 호랑이 같았다”고 회상한다. 운동을 하다 골절상을 입은 적도 다섯 번이나 있다고 한다.

중학교 담임 선생이었던 임환씨는 “몽준이는 놀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야외로 놀러갔다가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면서 “전혀 부잣집 티를 내지 않았으며, 학교 도서관을 지을 때 시멘트 1만포대를 지원받은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고 정 명예회장임을 알게 됐다.”고 술회했다. 그의 친구들도 정몽준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재벌가의 아들인지 전혀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정몽준의 학생시절 별명은 ‘꺼벙이’다. 큰 키에 소탈하고, 겸손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아버지한테는 다른 형제처럼 어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곤 했다.

정몽준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대에 진학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울산으로 변형윤·이현재 교수 등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초청해 크게 ‘한턱’을 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우리 몽준이가 혹시 사무 착오로 합격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면서 우리 아들을 잘 지도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정몽준은 1975년 학군 소위로 임관(13기), 77년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병역을 마친 정몽준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만 계속 일하면 일정한 범위 내의 좁은 세계밖에 모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에서 살아 있는 학문을 배우려 한 것이다.

정몽준은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들어가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세계의 중심인 뉴욕에서의 생활이 흥미로웠다고 회고한다.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다 78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으로 옮겼다. 조용한 도시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 전학의 이유였다.

정몽준은 MIT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80년 귀국해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정몽준은 이홍구 전 총리의 추천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홉킨스 대학의 국제관계대학에서 정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가문에서 한 사람 정도는 공직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몽준의 작은 아버지인 정신영 전 동아일보 기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거의 마칠 무렵 건강이 악화돼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정몽준을 공직에서 일할 현대가의 아들로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몽준은 87년에서 88년까지 일본에서 작은 아파트를 세내 박사학위 논문 자료를 준비했다. 그는 93년 5월 ‘일본에서의 정부와 기업 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현역 국회의원이 정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정몽준은 미국과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한국사회를 객관적으로 보게 됐으며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국과 일본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정몽준은 78년 여름 넷째 형수(이행자·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 부인)의 중매로 김영명씨를 미국에서 만났다. 정몽준에 대한 청 인상은 우선 큰 키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김영명씨도 여자로는 큰 키인 174cm로 친정 어머니가 “너는 키 큰 남자를 만나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정몽준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막내는 지난 96년 태어난 늦둥이다. 시중에는 예선이가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축구 예선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이름을 예선이라고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 의원은 최근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의미와 돌림자 ‘선’을 합쳐 예선으로 지었다고 밝혔다.

정치인 정몽준의 역사는 12대 총선인 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내가 처음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 것은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고, 1984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출마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가 나가면 여당 의원이 떨어진다고 나가지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그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하지만 공적 서비스를 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흔들림없이 지켜온 가장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라고 정치 입문의 배경을 밝히고 있다. 정몽준은 88년 13대 총선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지금은 5선의 중진 의원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다.

현대가 맏형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본 정치인 정 의원은 어떨까. 지난 대선기간 내내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정 회장도 ‘피’는 어쩔 수 없었던지 그 속내를 내보인 적이 있었다.“몽준 의원은 우리 형제들 가운데 제일 똑똑하고 잘 생겼다. 미국 MIT대학원도 졸업하고, 월드컵도 성공적으로 잘 치렀다. 대통령 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 정 의원의 평판은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독선적이고 냉혹하다고 지적한다. 그를 보좌했던 한 비서관은 “정 의원은 성격이 급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정몽준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합리적이고 매너가 깨끗하다는 평이다. “정 의원은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배어 있다. 직원들이 떠나는 차에 인사를 하면 ‘왜 차에다 대고 절을 하느냐. 하지 말라’고 말린다. 또 비서를 시키지 않고 직접 자신이 동료 의원에게 전화를 한다”며 다른 전직 비서관이 전했다.

정몽준은 1993년 1월 12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축구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1996년 5월 31일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성과를 일궈냈다. 일본에 절대 불리하다는 예상을 뒤엎은 정몽준의 외교력과 추진력의 승리였다. 월드컵 유치와 성공적 개최, 한국의 4강 진출 등을 배경으로 그해 대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8대 총선으로 6선 고지에 오른 정몽준은 오는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대권 고지를 향한 전초전이라 할 수 있다. 2002년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대권 고지에 오를 수 있을지 정몽준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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