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캐스트, SISACAST= 이병진 기자)
자동차 회사가 140번째 생일을 맞는다는 건 꽤 특별한 일이다. 더구나 그 시작점에 자동차의 발명이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1886년 칼 벤츠가 세 바퀴 모터바겐의 특허를 받은 뒤 140년.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하던 시절부터 전기차와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 오늘까지 메르세데스-벤츠는 자동차 산업의 거의 모든 시간을 지나왔다.
그렇다고 140번째 생일상을 지나치게 거창하게 차린 것은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는 지난 4월 E-클래스와 GLC, CLE를 기반으로 첫 번째 140주년 에디션을 선보였고, 이번에는 GLE와 GLE 쿠페, GLS로 무대를 옮겼다. 이름은 140주년 에디션 II. GLE 450 4매틱 AMG 라인과 GLE 450 4매틱 쿠페, GLS 580 4매틱 AMG 라인 세 종류로 구성된다. 국내 판매 물량은 모두 합쳐 680대다.
흥미로운 건 특별함을 만드는 방식이다. 커다란 140주년 엠블럼을 여기저기 붙이거나 화려한 장식을 더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GLE와 GLS에 색과 소재, 휠과 주요 장비를 다시 조합했다. 생일이라고 갑자기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걸치는 대신 잘 맞는 검은 재킷 한 벌을 꺼내 입은 셈이다.
검게 다듬은 GLE
GLE 140주년 에디션 II는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요란하지 않다. 대신 평소 GLE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차이가 제법 또렷하게 보인다. 중심에는 AMG 라인과 나이트 패키지가 있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앞범퍼 일부, 사이드미러, 창문 주변을 검은색으로 정리하고 다크 크롬 도어 핸들과 블랙 도어 실 패널을 더했다. 밝고 화려한 장식으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보다 전체적인 색의 채도를 낮춰 차분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외장 색상도 분위기에 한 몫 한다. 마누팍투어 알파인 그레이와 옵시디안 블랙 두 가지다. 특히 알파인 그레이는 GLE의 큰 차체와 검은 장식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SUV의 묵직함은 남겨두면서 도시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색이다.
여기에 22인치 AMG 5-트윈 스포크 경량 알로이 휠을 조합했다. 휠이 커질수록 시각적인 무게중심은 낮아지고 차체는 한층 단단해 보인다. GLE 특유의 부드러운 실루엣에 AMG 라인의 날카로운 디테일이 섞이면서 점잖기만 했던 대형 SUV에 적당한 긴장감이 생겼다. GLE 450 4매틱 AMG 라인은 알파인 그레이와 옵시디안 블랙 각각 175대씩 총 350대가 판매된다. GLE 450 4매틱 쿠페는 두 색상 각각 115대씩 총 230대다.
같은 GLE라도 쿠페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일반 GLE가 공간과 편안함을 앞세운 정통 SUV라면 GLE 쿠페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붕선 덕분에 훨씬 날렵하다. 140주년 에디션 II의 검은 장식도 이 차에서는 조금 다른 표정을 만든다. GLE에서는 묵직함을 강조했다면 쿠페에서는 스포티한 인상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특히 알파인 그레이 차체와 검은 창문 테두리, 대형 휠의 조합은 차체의 굴곡과 비례를 꽤 근사하게 살려낸다.
물론 쿠페형 SUV인 만큼 일반 GLE와 공간 활용성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대신 이 차를 고르는 이유도 분명하다. SUV의 높은 시야와 존재감은 갖고 싶지만 전형적인 SUV의 반듯한 뒷모습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위한 선택이다.
결국 GLE와 GLE 쿠페의 관계는 우열보다는 취향에 가깝다. 실용성을 우선한다면 GLE, 스타일에 조금 더 무게를 둔다면 쿠페다. 같은 옷감으로 만든 재킷과 블루종처럼 기본적인 분위기는 닮았지만 입었을 때의 인상은 제법 다르다.
차분하게 꾸민 실내
실내에서도 특별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블랙 나파 가죽과 앤트러사이트 오픈 포어 오크 우드 트림을 조합해 전체 분위기를 차분하게 정리했다. 반짝이는 장식을 늘리는 대신 가죽과 나무의 질감으로 고급스러움을 만드는 방식이다. 외관의 검은 장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최근 고급차 실내는 디스플레이가 커질수록 비슷해 보이는 문제가 있다. 화면 크기와 숫자로 경쟁하다 보면 어느 브랜드의 실내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GLE는 여기에 소재와 조명의 분위기를 더한다. 디지털 장비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가죽과 우드, 금속 장식이 적절하게 섞여 전통적인 고급차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이번 특별판 역시 새로운 실내를 만든 것은 아니다. 대신 기존 GLE에서 만족도가 높은 요소를 하나의 분위기로 묶었다. 특별판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추가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스럽게 달라졌느냐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 영리한 접근이다.
한 체급 위의 GLS
GLS 580 4매틱 AMG 라인 140주년 에디션 II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GLE가 벤츠 대형 SUV의 중심이라면 GLS는 말 그대로 꼭대기다. 세 줄 좌석과 거대한 차체, 넉넉한 실내를 앞세우면서도 단순히 큰 SUV에 머물지 않는다. 메르세데스-벤츠가 플래그십 세단에서 보여준 안락함을 SUV의 문법으로 옮겨놓은 차에 가깝다.
140주년 에디션 역시 이런 성격을 억지로 바꾸지 않았다. AMG 라인 외관에 나이트 패키지를 더하고 23인치 AMG 5-트윈 스포크 경량 알로이 휠을 장착했다. 외장 색상은 마누팍투어 알파인 그레이 한 가지이며 국내에는 100대만 판매된다.
23인치라는 숫자만 보면 꽤 과감하지만 GLS의 덩치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차에서는 과장돼 보일 법한 휠이 이 차에서는 비례를 맞추는 역할을 한다. 알파인 그레이 차체와 검은 장식까지 더해지면서 거대한 차체가 의외로 단정하게 정리된다. GLE가 잘 차려입은 SUV라면 GLS는 체격 좋은 사람이 맞춤 정장을 입은 모습에 조금 더 가깝다.
V8이 만드는 여유
GLS 580 4매틱 AMG 라인의 성격을 완성하는 건 결국 엔진이다. 4.0리터 V8 가솔린 엔진과 9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려 최고출력 517마력, 최대토크 74.4kg•m를 낸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4.9초다.
대형 SUV에서 이런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빨리 달릴 수 있어서가 아니다. GLS처럼 크고 무거운 차에서는 출력의 절대적인 크기보다 언제든 힘을 꺼내 쓸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 여러 사람이 타고 짐까지 실은 상태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거나 추월할 때 힘을 짜내는 느낌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500마력이 넘는 출력도 GLS에서는 스포츠카의 자극보다는 여유에 가깝다. 운전자가 굳이 엔진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필요한 만큼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 큰 엔진을 얹은 플래그십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동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금 V8 엔진을 얹은 대형 SUV라는 사실 자체도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40주년이라는 숫자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부분이다.
GLS 140주년 에디션 II에서 눈여겨볼 장비는 E-액티브 바디 컨트롤이다. 각 바퀴의 서스펜션을 주행 상황에 맞춰 능동적으로 제어해 차체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요철을 지날 때 발생하는 상하 움직임을 줄이고 코너에서는 거대한 차체가 불필요하게 기울어지는 것을 억제한다.
대형 SUV의 숙제는 늘 비슷하다. 차체를 크게 만들면 공간과 존재감은 좋아지지만 무게와 높은 무게중심 때문에 승차감과 움직임을 세밀하게 다루기가 어려워진다. E-액티브 바디 컨트롤은 이 물리적인 한계를 전자제어 기술로 적극적으로 다루는 장비다.
덕분에 GLS는 크기를 감추려고 애쓰기보다 큰 차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도심에서는 부드럽게, 고속도로에서는 안정적으로, 굽은 길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출렁이지 않도록 차체를 다독인다.
플래그십 SUV에서 중요한 것은 스포츠카처럼 날카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운전자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거대한 차체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GLS가 지향하는 안락함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140년을 기념하는 법
140주년 에디션 II를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엔진이나 차체를 새로 개발한 것도 아니고, 기존 GLE와 GLS의 성격을 뒤집는 변화도 없다. 오히려 그래서 흥미롭다. 특별판이라고 하면 흔히 전용 엠블럼을 붙이고 색을 바꾼 뒤 희소성을 강조하기 쉽다.
이번 모델도 한정된 수량과 전용 구성이라는 특별판의 문법을 따르지만 방향은 비교적 절제돼 있다. AMG 라인과 나이트 패키지, 마누팍투어 색상과 대형 휠, 고급 소재와 주요 장비를 하나의 분위기로 묶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GLE는 조금 더 젊고 단단해졌고, GLE 쿠페는 본래의 스타일이 한층 또렷해졌다. GLS는 플래그십 SUV다운 존재감과 안락함에 힘을 실었다. 같은 140주년 에디션이라는 이름 아래 묶였지만 세 모델의 성격까지 똑같이 만들지는 않았다.
1886년 세 바퀴 자동차 한 대로 시작한 이야기는 140년 뒤 거대한 SUV에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자동차는 훨씬 빠르고 안전하고 편안해졌고, 이제는 스스로 주변을 살피고 전기로 달리는 시대까지 왔다. 그 긴 시간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GLE와 GLS를 골랐다는 것도 제법 상징적이다. 오늘날 벤츠를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고급스러움과 실용성, 성능과 존재감이 이 두 SUV에 두루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특별판은 그 사실을 요란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좋은 색을 고르고, 검은 디테일을 더하고, 필요한 장비를 채웠다. 140년쯤 된 브랜드라면 생일을 축하하는 방법도 이 정도로 여유로워도 괜찮다. [시사캐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