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6 22:03 (금)
[컬쳐_Anchor] 손바닥 안의 눈부신 아고라. 권력의 확성기인가, 숭고한 영혼의 거울인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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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_Anchor] 손바닥 안의 눈부신 아고라. 권력의 확성기인가, 숭고한 영혼의 거울인가 (2/2)
  • 양태진 기자
  • 승인 2026.11.06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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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바다 위로 사유의 닻을 내려 문화적 심층을 길어 올리는 칼럼

​‘좋아요’의 도파민 숫자를 걷어내면 보이는, 진정한 공감 연대의 SNS 활용법은 따로 있다? 下편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그럼에도 사용자가 SNS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과 더불어, 때마다 주변 모두를 붙잡고 한꺼번에 눈을 맞춰가며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공유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선의(善意)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이에 더해 유명인과 정치 지도자, 내지는 권력자들은 반나절만 침묵해도 주도권을 빼앗겨 무능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걱정과 언제라도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큰 작용을 하는데,

 

바쁜 일상 속 타인과 관계 맺기도 쉽지 않은 지금, SNS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주는 가장 유용한 연결 통로로 다가온다. 평범한 개인에게는 일상의 작은 단면을 공유함으로 고립감을 털어내주고, 크고 작은 인플루언서들에게는 자신의 안목과 경험, 진심 어린 정보들을 아낌없이 나누며 선한 영향력으로 함께 성장해 간다는 벅찬 효능감을 안겨준다. 일일이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과 생각의 보폭을 맞추며 연대할 수 있다라는 이 믿음은 발신자로 하여금, 화면을 채우는 행위를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가치 있는 소통으로 여기도록 종용(?)하는데..(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이러한 당위성과 존재론적 불안은 또 다른 눈먼 맹점을 잉태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의 발신 하나가 대중과의 쌍방향 교감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 순간 발신자는 SNS가 지닌 태생적 일방성을 망각해 버리고 마는데,

다시 말해 일반인들에게 SNS는 결핍을 털어놓고 일상의 체온을 나누는 수평적 연대의 장소에 머물지만 공적 아우라를 지닌 이들에게 SNS는, 자신을 더욱 드러내기 바쁜 과시의 무대를 넘어, 치적을 포장하고 지지세를 결집하는 등 확성기의 형태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다.

 

 

자기 확신의 이면에서 SNS 특유의 구조적 맹점은 조용히 싹을 틔운다. 피드 위에 정성껏 올린 글과 사진에 쏟아지는 공감의 댓글을 보며 대중과 온전히 교감하고 있다는 착시에 빠져듦에, 그러한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발신자는, 이 공간이 지닌 태생적 평면성과 일방성을 망각해 버린다. 소통하고 있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화면 밖 진짜 타인의 거친 숨소리와 이견을 견뎌내는 맷집은 약해지고, 나를 무조건 지지해 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만 안도하는 폐쇄적 나르시시즘에 갇히게 될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달콤한 착각이 한 국가의 운명과 거대한 공론장을 쥐락펴락하는 최고 권력자의 손에 쥐어졌을 땐 과연 어떠한 파열음이 생겨날까.(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여기서 해당 권력자가 자신의 SNS 속 반응을 ‘살아있는 민심’으로 착각하는 순간, 소수의 극단주의가 다수의 상식을 압도하는 다소 위험한 민주주의의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에 실제로 SNS상에서 비슷한 소수 의견끼리 뭉치고 서로의 확신을 증폭시키는 폐쇄적 환경, 이른바 거대한 메아리방인 ‘에코 체임버(Echo Chamber)’가 관찰된다는 연구가 적지 않은 바,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23년 발표한 분석을 봐도 이러한 광장의 기형적 구조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일론 머스크'의 인수 이후 미국 성인 트위터(현 X) 이용자 중 게시량 상위 20%가 미국 성인 이용자 트윗의 무려 98%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과거 2021년 조사에서도 상위 25%가 97%를 작성했던 점을 상기하면 플랫폼의 주인이 바뀐 뒤에도 '소수의 과잉된 목청이 광장을 독점하는 현상'은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셈이다.

 

 

다만 그 메아리의 방아쇠가 추천 알고리즘인지, 아니면 비슷한 목소리만 골라 듣는 이용자의 선택인지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여러 연구는 알고리즘의 추천과 이용자의 선택이 서로 맞물리며 그 양상 또한 플랫폼과 이용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상단 관련) 물론 미국 내에서의 조사 결과를 우리 SNS의 광장에 그대로 덧씌울 수만은 없다. 허나 같은 플랫폼에서의 착시인 만큼 이를 본보기 삼아서라도, 권력자의 타임라인 아래 쏟아지는 댓글창의 열기를 결코 민심 전체의 온도로 느껴서는 안될 것이다. 환호에 취해 반대편의 서늘한 침묵이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소수의 불평’으로 폄하하는 순간, 정치는 광장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예술이 아닌 내 편만을 결속시키는 ‘팬덤의 잔치’로 쪼그라들기 때문이다.(하단 관련)(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직접 소통이 주는 효능감이 되레 권력자의 시야를 좁히고 확증편향의 늪으로 밀어 넣는 역설. 지도자에게 SNS가 달콤한 권력의 확성기인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을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전체 분위기와 흐름까지 주도할 수 있는 유명 권력자들의 SNS활동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흩어져 있는 대중의 고단한 숨결을 폭넓게 감싸 안으면서도, 그들의 작은 방 하나하나를 성숙한 시민의 광장 안으로 엮어낼 수 있는, '통합의 그릇'이 되어야 마땅하단 얘기다.

 

 

누구나 단말기 하나로 수십, 수백 명 이상을 불러 모아 소통의 중심에 서는 1인 미디어/SNS시대는 고립된 개인들에게 전에 없던 해방감과 연대감을 선사해 왔다. 허나 이 다채로운 풍경은 동시에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는 것. 취향과 목적에 따라 잘게 쪼개진 이 작은 무리들은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만 결속하며 자칫 편향과 갈등의 섬으로 고립되거나, 누군가의 잇속에 의해 여론몰이의 도구로 쉽게 악용될 수도 있는 취약성을 품고 있다. 이는 나 홀로 SNS를 활용하는 평범한 개인의 가벼운 옷차림과, 수백만 시선을 짊어진 지도자가 걸쳐야 할 옷의 무게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자각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역사의 시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오늘날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안겨준다.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는 시장이자 시민들의 공적 생활이 펼쳐지던 광장이었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정치와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했고, 민회와 법정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비록 그 참여권은 성인 남성 시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직접민주주의의 요람이었다.

 

 

(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허나 그러한 민주정 역시 대중의 판단과 정치적 선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던 정치 지도자들, 이른바 '데마고그(demagogue)'*의 존재는 고대 아테네 정치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 정치적 대립과 지도자들의 판단은 민주정의 운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아테네의 민주정은 전쟁 참패와 제도적 위기, 그리고 반민주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두 차례나 전복되는 격랑을 겪게 된다.

 

*데마고그(Demagogue): 고대 그리스어 'demagogos'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민중의 지도자'라는 뜻이었다. 허나 후대에는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해 지지를 얻으려는 선동 정치가를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발전했다.

 

 

 

국가 최고 수반이라는 지위는 전속 공보 라인과 대변인실, 국무회의와 공식 대국민 담화 등 가장 정제되고 권위 있는 메시지 전달 창구를 언제든 가동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럼에도 새벽잠을 쪼개가며 스마트폰의 작은 자판을 두드리며 심지어 손수 SNS관계의 흔적까지도 지워나가는 권력자의 행위는, 막강한 공적 포장지가 자신의 칼날 같은 생각의 맥락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신, 손가락 하나로 전선을 형성하고 지지층을 결집했던 성공 방정식에 대한 강력한 의존성에 의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수천만의 운명을 짊어진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과 불안을, 그저 손바닥 창 안에서 쏟아지는 지지자들의 즉각적인 호응과 그에 따른 도파민 정도로 해결하려는 것은 아닐지 심히 우려되는 바,(상단) 특히 진영의 담장 너머, 익명의 그늘에 숨은 커뮤니티의 활자 그대로를 ‘바닥 민심의 경청’이란 명분으로 퍼 나르거나 개개인의 댓글에 반응하는 권력자의 행위는 멈춰져야 할 것이다. 이는 소통의 진화라기보다 편향된 언어에 권력의 날개를 달아주는, 국가 지도자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퇴행에 가까운 것이 될 수도 있기에.(하단)(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21세기의 손바닥 위에 열린 디지털 아고라 역시 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광장은 과거 아테네의 돌바닥보다 훨씬 넓고 동시에 더 자극적이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 평평한 무대에서 정작 희귀해진 것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며 묵묵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침묵과 경청’의 윤리인 것을.

광장의 품격이란 누가 가장 큰 소리를 외치느냐가 아니라, 제일 낮은 곳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SNS를 통한 진정한 연대의 명확한 선결 조건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력자 스스로가 손바닥 창이라는 참호를 박차고 나와 침묵이 곧 패배라는 의식을 버리고, 즉흥적인 문장 몇 줄 대신 헌법과 (행정) 시스템이라는 정교한 제도를 통해 국정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침묵의 미덕을 회복하는 것, 다시 말해, 정적(靜寂)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시급하단 얘기다.

 

 

여기서의 경청이란 내가 올린 글 아래로 쏟아지는 지지층의 달콤한 찬양을 확인하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내 말을 내뱉고 싶은 조급증을 억누른 채로, 화려한 피드 뒤편에 웅크린 보통 사람들의 투박한 절규와 반대편의 서늘한 질타, 그리고 알고리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침묵의 행간을 끝까지 읽어내는 무거운 자제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상단) 스피커의 볼륨을 높여 광장을 장악하기보단 스스로를 낮추며 시대의 신음과 사회적 약자들의 결핍을 살피는 고감도 레이더가 되는 것만이, 이 위험한 도구를 쥔 자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성숙함이 아닐는지.(하단)(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사회적 계약을 축적해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국가 지도자의 언어는 대부분 사적 감정의 배출구나 편향된 진영 결집의 도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도자의 말이란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를 수호하면서도 '도의(道義)'를 바로 세워 서로의 갈등을 봉합하는 가장 엄중하고도 신중한 언어여야 마땅했다.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부터 근대 민주주의의 링컨이나 처칠에 이르기까지, 국가 수반의 말은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절제와 숙의의 산물이어야 했다. 허나 새벽녘 타전되는 대통령의 짧은 한탄이나 즉흥적인 반박, 특정인과의 사소한 팔로우 정리 같은 것들은 권력의 신비와 권위를 스스로 발가벗겨버린다.

권위주의의 탈피라는 미명 아래 인류 문명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공적 책무의 무게와 국가적 품격이 일종의 가벼움으로 전락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문명사적 법치가 한 지도자 개인의 자의적 충동에 의해 흔들릴 수도 있다라는, 또 하나의 작지 않은 위험 징후로도 의심되는 바,

 

 

지도자가 밤낮없이 피드를 갱신하며 개인 SNS를 통해 특정 사안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주거나 감정을 노출하면, 공식 부처와 참모들의 정무적 고뇌는 무력화된 채 국정은 대통령의 심기 경호와 피드 해석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러한 지도자에 빙의해 본다면, "나는 권위의식의 껍질을 깨고 국민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는 가장 진솔하고도 민주적인 지도자다. 언론의 왜곡과 참모들의 관료주의적 답답함을 넘어 민심과 직접 손을 잡고 돌파구를 열고 있다구."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겠건만, 이에 참모진들의 경우, 공식 라인을 거치지 않은 새벽 포스팅 하나로 기존의 정교한 정책 조율과 정무적 전략이 단숨에 뒤집히는 돌발 변수에 전전긍긍할뿐 말릴 수도, 방치할 수도 없는 권력자의 글 한마디에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이에 반해 열혈 지지층은, '가장 인간적이고 통쾌하며, 밀실이 아닌 광장에서 함께 싸우는 친근한 지도자'로서 칭송하는가하면, 중도 및 합리적 시민의 경우, 대통령의 자리에 요구되는 진중함과 통합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 채, 국가의 일정 부분이 사유화되고 있다는 불안감과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사진출처: [컬쳐_Anchor] 전용 아카이브)

이에 대중은 지도자의 SNS식 발언에 환호하거나 불필요한 소음으로 치부하는 등, 관음증적 관심과 쾌락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 몇 글자, 몇 줄의 쇼맨십?이 아닌 지난한 제도적 조율로부터 이루어져야함을 엄중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손바닥 안의 좁은 화면을 끄고 국가 전체의 넓은 지평을 바라보는 성찰적 결단.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지지자 반대편의 서늘한 눈빛까지도 온전히 품에 안을 때에 비로소 권력자는, 불안에 쫓기는 디지털 투사 대신 문명이 요구하는 진정한 시대의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 것이다.

손쉬운 확성기의 유혹을 떨쳐내고 자신의 내면을 비워냄으로 SNS를 보다 성숙한 숙의의 광장으로 되돌려 놓는 일. 이와 더불어 말하기보단 듣기를, 주장하기보단 공감하기를 택할 때 이 사각의 프레임(SNS)은 비로소, 영혼 없는 소음의 배출구를 벗어나 흔들리는 대중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진정한 ‘마음의 다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시사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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