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캐스트, SISACAST= 박이슬 문화평론가)
김장 풍경이 점차 사라지는 오늘,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단지 한 세대의 계절 풍습이 아니다. 오랫동안 지역 곳곳을 잇던 생활 협력의 구조, 즉 서로 기대며 살아가던 관계의 질서가 조용히 해체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기술이었다.
겨울철 저장이 절실했던 시절, 절임과 발효는 생존을 위한 지식이자 기술이었다. 고려시대 문헌에 등장할 만큼 오래된 이 기술의 뿌리는 깊지만, 진짜 핵심은 그 기술이 작동하던 방식에 있었다. 김장을 해서 겨울을 나야한다는 계절적 압박은 자연스럽게 이웃과 친족을 불러 모았고, 서로의 시간과 노동을 나누는 구조가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쌓인 신뢰는 단순히 인심을 베푸는 차원을 넘어, 지역 사회가 유지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옛날 김장에는 복잡한 단계가 있었다. 절이기, 씻기, 다지기, 양념하기, 보관하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역할이 촘촘히 나뉜 하나의 작은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 조화가 하나의 겨울을 준비했다. 김장을 하는 하루는 작은 사회였고, 그 안에서 각자의 손길은 하나의 거대한 겨울 전략으로 이어졌다.
또한 김장에는 지식의 전승 방식 또한 독특했다. 어느 집은 소금 간을 줄여 더 늦게 시어지게 한다는 조언, 어느 집은 절인 배추의 물기를 길게 빼야 맛이 깊어진다는 경험적 지혜가 비공식적인 경로로 축적됐다. 이는 지역 사회 내부에서 지식이 순환하는 방식, 말로 전해지고 행동으로 익히는 생활 인문학의 장이었다.
그러나 김장의 힘을 가장 두텁게 만든 것은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정서적 흐름이었다. 힘든 노동을 함께 버티고, 배춧국 한 그릇에 두툼한 수육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며 서로의 수고를 다독이는 시간은 관계를 깊게 숙성시켰다. 김치 한 통을 나누어 건네는 손길은 관계를 이어줬으며, 이러한 경험이 계절마다 반복되며 지역적 유대의 뼈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 냉장 유통망과 대형마트, 택배 시스템은 김장의 기능을 거의 완전히 대체했다.
김장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김장을 통해 유지되던 생활 협력의 구조인 서로에게 시간을 내고, 경험을 나누고, 역할을 분담하고, 신뢰를 만들던 과정이 함께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기술은 편리해졌지만, 그 기술이 대체해버린 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 기술을 필요로 한다. 전통적 김장의 풍경을 그대로 되살릴 수는 없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원리는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의 경험을 빌리고,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함께 한 과정 속에서 신뢰를 쌓는 구조는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사회적 자산이다.
지역의 협업 프로젝트, 동네 기반의 교육·돌봄 네트워크, 시민들이 직접 만드는 작고 느린 연대 활동들은 모두 김장의 원리를 시대적으로 재해석한 모습들이다. 과거의 연대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의 연대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선택이다. 김장이 사라져도, 삶을 묶는 기술은 다른 형태로 남을 수 있다. 그 방법을 다시 익히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결국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김장의 종말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빚어내기 위한 기술의 변주이며 마당에 김장독이 없어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의 겨울을 함께 준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어느 부분을 다시 천천히 발효시키고자 하느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시사캐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