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적 상식을 비틀어(왜:歪),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역설 인문학 산책
- 알고리즘의 오만한(?) 초대 : 당당해 보이는 추천 리스트건만 왜 스크롤할 땐 씁쓸?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잠 못 드는 밤. 뒤척이기만을 반복하던 그때,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집요한 유혹에 한 번쯤 넘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보다 더 날 잘 안다 자부하는 그 안의 알고리즘은 곧이어 '추천' 또는 '맞춤'이란 화려한 성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우린 역설적이게도 스크롤과 클릭만을 반복하다 씁쓸한 갈증 속에 다시 눈을 감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 나를 위한 추천이건만, 왜 우린 잠시의 만족감은 뒤로한 채, 묘한 피로감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래도 나름 완벽해보이는 추천 리스트이건만, 왜 우린 다소 무기력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나한테만 맞춰진 세상 속에서 헛헛해 하는 건지. 여기에 더해, 나만의 취향이란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건지 그런 근원적 물음까지도 고개를 쳐 드는 요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느끼는 찰나, 그 감각은 사실 데이터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일지 모른다. 시민 운동가 '엘리 패리저(Eli Pariser)'가 경고한 ‘필터 버블(Filter Bubble)’은 알고리즘이라는 부지런한 정원사가 우리의 머릿속을 가꾸는 과정과도 사뭇 닮아 있다. 이 정원사는 소비자의 과거 기록을 양분 삼아 오직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꽃들만을 심어 안락한 풍경을 제공하지만, 정원 너머에 존재하는 광활하고 낯선 숲의 존재는 철저히 은폐한다. 이는 디지털 세계가 나를 확장하는 통로가 아닌, 나의 고정관념과 과거의 그림자만을 끝없이 비추는 ‘거대한 거울의 방’으로 변모해가는 것. 시스템이 조립해 준 취향의 조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때,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우연한 만남이 주는 경이로움을 잊어버린 채로 살기 쉽다. 알고리즘이라는 비서가 내어주는 매끄러운 정답지에 안주하는 순간, 우리는 나를 성장시킬 ‘의외의 발견’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 진정한 취향의 독립은 나를 투영하는 거울을 깨고, 알고리즘이 가르쳐주지 않는 거친 황야로 직접 걸어 들어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그렇다면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메인 화면은 더이상 단순한 선택 공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디지털 거울'일 뿐,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오늘의 내가 아닌 어제의 흔적 짜깁기가 아닐런지.
이처럼 알고리즘은 과거의 기록을 먹고 산다. 즉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미래는 결국 해당 사용자에 관한 '과거'를 무한으로 복제해 놓은 것에 불과하단 얘기. 새로운 장르나 여타 다른 형태의 예술에 도전하거나, 전혀 다른 결의 영화나 컨텐츠로 감동할 기회는 이런 시스템의 효율성 안에서 조용히 삭제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안락함을 무기로 우리의 삶에 파고드는 알고리즘을 이젠 거대한 데이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로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인간의 영혼이 지닌 고유한 특성인 '무작위성'과 '우연한 발견의 기쁨'은 효율성이라는 칼날 아래 잘려 나가고, 기계적인 정확도로 복제된 취향만이 우리 앞에 놓이는 상황인 것. 시민 운동가 '엘리 패리저'가 경고했듯, 이러한 정교한 시스템은 우리가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까지 결정하며 우리의 시야를 교묘하게 통제해 버리는데, 그 데이터의 공장에서 찍어내는 취향의 모조품들은 우리에게 실패 없는 만족을 약속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매끄러운 정답지 안에서 우리는, '나를 성장시킬 의외의 발견'으로부터 영원히 소외되는 것이다. 진정한 취향의 독립은 시스템이 조립해 준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나, 알고리즘이 가르쳐주지 않은 거친 황야로 직접 발을 내디딜 때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예측 불가능한 오류와 낯선 길에서의 헤맴이야말로 우리를 기계와 구분 지을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가치가 아닐까 싶다. 그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늦추고, 시스템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진짜 자아와 조우할 수 있을 것이기에.(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그럼 과연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취향 확장의 포기는 정당한 것인지 결정적 물음이 치고 올라온다. 알고리즘이 짜준 촘촘한 그물망 안에서 안전함을 향유(?)할 순 있었을진 모르겠으나, 그 안에선 결코 만나기 힘들었을 '새로운 나'의 모습, 그러니까 데이터가 정의한 좁은 틀 안에 갇힌 내가 아닌 진짜 무엇에 가슴이 뛰고 무엇에 열광했었는지, 그런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본래의 내 모습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행복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갈 때 보다, 기대하지 않던 골목에서 취향에 맞는 음식이나 음악과 마주할 때 더 폭발하는 법. 하지만 알고리즘은 우리가 '길을 잃을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가운데서 오로지, 데이터가 분류해 낸 '더 좋아할 법한' 울타리만을 쳐 둘 뿐인 것이다.
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 교수가 제안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의 핵심 기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 기업은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 이익을 위해 우리의 행동을 '수정'하고 '통제'하는 단계로까지 진입했다는 것. 이에 우리는 알고리즘이 택한 그 좁아진 선택의 폭 안에서 더 편리해졌다고만 믿는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의 정교한 계산이 닿지 않는 저녁 거리의 골목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우연의 생명력'이 맥박치고 있다. 이름 모를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투박한 선율, 예기치 않게 쏟아지는 주황빛 전구 아래의 웃음소리, 그리고 목적 없이 걷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이의 눈인사는 데이터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성스러운 무작위성'이 아닐런지. 우리는 최적화된 삶을 살기 위해 알고리즘의 비서를 고용했건만, 진짜 감동은 항상 최단 거리가 아닌 '우회로'에서 찾아왔음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마크 그라노베터'가 강조한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 — 나와 비슷한 주변인보다 오히려 낯선 이와의 느슨한 관계가 새로운 정보와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사회학적 통찰 — 이 바로 이런 낯선 거리에서 발휘되는 것처럼, 나와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이들과의 우연한 조우가 나의 좁은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그 균열 사이로 새로운 창조의 빛이 스며들도록 할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추천받는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길을 잃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는 것이기에 화면 속 매끄러운 픽셀 대신, 거친 돌담의 질감과 사람 냄새 나는 시장의 소음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보는 건 어떨까. 알고리즘이 가르쳐주지 않는 그 거친 황야와 낯선 골목들이야말로 당신의 영혼을 깨우고, 당신을 어제와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할 진정한 발견의 장소가 아닐지. 문밖을 나서는 순간 시작되는 이 투박한 우연들이 모여, 비로소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당신만의 유일한 인생 서사가 완성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을 도와주기 보단 '선택할 필요가 없는 상태'로 유인해온 알고리즘으로 우린 자칫, '선택 근육'이 퇴화해 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주도권을 데이터에 저당 잡혀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저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에서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경고를 한 바 있건만, 알고리즘은 이러한 과잉된 선택지를 줄여주는 척하면서 사실상 우리의 결정권을 대신 행사해 오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 우리는 보다 충격적인 가설과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맞추는 것이 아닌, 우리를 '예측 가능한 존재'로 성형해 온 것이라는 것. 그럼 당신이 갑자기 엉뚱한 것을 좋아하게 되면 오류를 일으키거나, 되려 그 변함이 제거되도록 끊임없이 익숙한 것만을 더 주입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릭 사댕(Eric Sadin)'의 '알고리즘적 통치성(Algorithmic Governmentality)' - 인간의 자율적 판단이 기계의 지시로 대체되는 시대적 위험성 - 으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영혼의 무작위성 관련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은 예측 불가능한 '가변성(Human Variability)'과 영혼의 무작위성에 있다. 데이터의 딱딱한 벽을 깨고 낯선 우연을 향해 몸을 내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알고리즘이 가르쳐주지 않은 진짜 삶의 질감을 마주하게 될 것이란 것.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처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적은 언제나 계산된 리스트 밖에서 찾아오는 것처럼,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길을 잃는 용기야말로, 우리를 기계와 구분 짓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진짜 나를 찾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의 '블랙 스완’ 이론 : 레바논계 미국인 통계학자이자 석학인 나심 탈레브가 정립한 개념으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일단 발생하면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 만큼 거대한 충격을 주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뜻한다. 알고리즘이 통제하는 선형적 데이터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간의 삶을 바꾸는 ‘우연과 변동성’의 가치를 강조할 때 핵심 근거로 인용된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이러한 관점에선 알고리즘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변화하는 인간'이다. 시스템은 당신이 어제 좋아했던 것을 오늘 더 강렬하게 좋아하도록 몰아세우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잠재력, 즉 내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인간의 가변성'을 데이터의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과감히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넷플릭스 화면 앞에서 느끼는 미묘한 피로감은 사실, 영혼이 보내온 조용한 경고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데이터 뭉치보다 더 큰 존재다"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기계가 규정한 '나'라는 틀 안에 갇혀 질식해가던 신호였던 셈.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현대인이 기술적 가속 속에서 세상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공명(Resonance)*의 상실' 상태에 빠져 있다고 설명한다. 알고리즘이 짜준 완벽한 식단에는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진짜 '공명'이 빠져 있다라는 것.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의 ‘공명(Resonance)’ : 주체와 세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함께 진동하는 상태를 뜻하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통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세상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오직 예측 불가능한 우연 속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여기서의 진정한 울림은, 데이터가 결코 계산하지 못하는 '오류'에서 탄생할 것이기에, 인생을 바꾼 책이나 운명적 사랑 등, 우리가 헤매고 실패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마주하던 '투박한 우연'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들에 대해 우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심 탈레브(Nassim Taleb)'가 말한 '블랙 스완(Black Swan)'에서 처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순간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서 찾아올 것이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러한 '헤맴의 과정'을 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알고리즘의 '최단 거리 만족'에서 벗어나,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발견했을 때에 느꼈던 도파민 너머의 깊은 성취감 만큼은 되찾아야 한다. 이는 '영혼의 영양실조'로도 표현될 수 있을 만한 현대인들의 현 상태에 있어, 인간 존재의 '유일성(Uniqueness)' 내지는 '고유성', 그리고 숭고한 영혼 만큼은 잘 지켜보자라는 사회적 합의와 사명감, 그리고 그에 따른 깊은 성찰 또한 내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시사캐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