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적 상식을 비틀어(왜:歪),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역설 인문학 산책
- 인간의 발칙한(?) 오류 : 촘촘한 예측 시스템이건만 왜 어긋날 땐 짜릿?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그렇다면 이 정교한 사육장(?) - 알고리즘의 추천 공간 -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화면을 무의미하게 위아래로 끌어당기며 '새로고침'을 연타하거나 알고리즘을 초기화해 보겠다고 취향 설정을 만지작거리는 임시방편, 내지는 애플리케이션을 아예 삭제하거나 계정을 전환하는 1차원적인 방식만으로는 결코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또한 시스템이 허용한 사각틀 안에서의 움직임일 뿐이기에, 데이터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의도적 무작위성'을 삶에 이식하는, 그런 치밀하고도 치열한 고도의 전략이 필요할 터,
진정한 행복은 알고리즘이 설계한 최단 경로가 아닌, 투박한 먼지가 쌓인 LP판을 직접 고르고 지도를 펼쳐 길을 찾는 '자기 결정성'에서 피어난다. '하르트무트 로자'가 말한 세상과의 '공명' 또한 내가 직접 부딪히고 탐색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낸 순간에만 찾아오는 귀한 울림이듯이, 효율성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와 스스로 선택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불편함을 감수할 때에 비로소,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나만의 유일한 인생 서사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이에 기계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오류'를 스스로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하는 바, 이는 알고리즘이 구축한 선형적 세계관에 대한 철학적 저항이자, 기계의 파라미터 속에 박제된 자아를 되찾는 실천적 투쟁이 될 것이다.
그럼 그 구체적인 첫 번째 실천으로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안한 공간적 방랑인 ‘표류(Dérive)’*의 개념을 디지털 세계로 확장한, '디지털 표류(Digital Drift)'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 이를 풀어 말하자면, 가끔은 시스템이 절대로 추천하지 않을 만한 이질적인 단어들, 이를테면 '18세기의 복식사'나 이름 모를 행성의 지질학 같은 것들을 검색창에 무심히 던져보는 것으로
* 상황주의자(Situationist) : 1950~6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전위 예술가와 철학자 집단으로, "자본과 미디어가 짜놓은 수동적 일상에서 벗어나 인간이 주체적으로 '대안적 상황'을 만들어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를 지칭한다.
*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와 표류(Dérive):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전위 예술 집단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의 주도자인 그는 현대 사회를 자본과 미디어가 편집해 놓은 가공한 '이미지(스펙타클)'를 인간이 주체성을 빼앗긴 채 수동적으로 관조만 하는 ‘스펙타클(Spectacle) 사회’로 규정했다. 그가 제안한, 권력과 자본이 설계한 도시의 효율적 동선을 거부하고, 목적 없이 공간을 무작위로 방랑하며 실존을 회복하자는 실천적 저항 운동이 바로 ‘표류’인 것으로 본 칼럼에서는, 알고리즘의 정교한 추천 트랙을 이탈하여 디지털 영토를 주체적으로 방랑하는 '디지털 표류'의 개념으로 확장·차용했다.
진정한 발견은 최단 거리의 효율성이 아닌, 투박한 우회로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보거나 서점에서 무작위로 책을 집어 드는 행위는, 데이터가 계산할 수 없는 삶의 '성스러운 무작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어줄 것이다. 매끄러운 액정 화면이 아닌, 거친 돌담의 질감과 시장의 소음과도 같은 진짜 세상의 질감 속에서 알고리즘이 가르쳐주지 않는 그 투박한 우연들을 모아 비로소,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여러분만의 유일한 인생 서사가 완성될 수 있길.(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이는 단순히 AI에게 더 고도화된 취향을 학습시키기 위한 '기술적 유용성'의 취지가 아니다. 알고리즘의 촘촘한 예측 범위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림으로써 기계가 가둔 데이터의 영토 너머에 엄연히 존재하는, ‘뜻밖의 세계’들을 주체적으로 목격하겠다는 일종의 상징적 선언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의 '자기 결정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환경을 통제할 때 가장 큰 효능감과 행복을 느낀다고한다. 알고리즘이 그 '주도권'을 교묘하게 빼앗아간 측면에서 우리는, 추천받은 영화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것은 알고리즘의 승리지 우리의 발견이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에 직접 발품을 팔아 찾아낸 이름 없는 밴드의 노래가 알고리즘이 골라준 차트 1위 곡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노래 속에 우리의 '선택과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인이 알고리즘에 씁쓸함을 느끼는 본질은 '내 취향이 박제되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기계가 주는 대로 받아먹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루에 한 번 추천 미끼를 거부하고 엇박자를 내는 행위는, 내 뇌가 무의식적 도파민에 지배당하지 않고 "내 손가락의 움직임은 여전히 내 의지가 통제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강력한 심리적 훈련이 될지 모른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그렇다면 손끝으로 먼저, 그 첫번째 실천을 감행해 보자.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취향의 미끼'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일상적 밀당으로 (스마트폰) 첫 화면의 가장 매력적인 추천 영상을 매일 몇번씩 모른 척해 보는 것. 그리고 기계의 호출에 조건반사적 반응을 유도하던 앱의 알림들 또한 과감히 꺼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누군가는 이 사소한 외면이 거대한 시스템을 타파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무의식을 완벽하게 간파해 낸 기계의 낚시 갈고리를, 나만의 이성으로 끊어내는 이 짧은 1초야말로 기계에 저항하는 가장 첫 번째 주체적 반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았을 이질적인 콘텐츠에도 짐짓 '좋아요'를 눌러보자. 시스템 예측 모델에 이 장난스러운 오답을 제출해 보는 것 또한, 나름의 방법 중 하나가 될지 모르니까.
기계가 제시하는 ‘안전한 지름길’을 과감히 이탈해 거친 산길을 택한 보행자의 모습. 효율성이라는 궤도를 벗어나 주체적으로 헤맬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진짜 삶의 풍경을 상징하고 있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다음 두 번째 방법으로는, 효율성의 세계에선 ‘낭비’라 치부되는 ‘아날로그적 무작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보거나, 서점에서 눈을 감고 손끝에 처음 와 닿는 책들을 펼쳐 드는 무모함과 같은 투박한 행동들로 '자유의지의 증명'을 몸소 실천해 보는 것.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최적의 경로(Shortest Path)를 과감히 이탈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알고리즘이 설계하지도 못하거니와 설계할 수도 없는 진짜 삶의 풍경과 마주하게 될 터,
인간의 유한함이란 본디 헤매고, 낭비하고, 서툴게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만 그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까닭으로, 알고리즘의 안락한 울타리를 잠시 걷어내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현 AI 시대에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존엄한 엇박자가 아닐런지.
이토록 사소하고 발칙한 엇박자들은 알고리즘에게 '나를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라'라고 하는 무언의 선언이자 자기 확신으로도 읽힌다.
이에 더해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최적의 경로에는 실패가 없듯 '뜻밖의 행운(Serendipity)'도 없다라는 것.
다시 말해, 의도적으로 헤매는 투박한 우연 속 '운'과 같은 것들은 광활한 가능성 영역 내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기계의 트랙을 과감히 이탈해 방랑을 자처한 우리 인간들만이, 단순한 운을 넘어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아주 경이로운 선물이자 특권 또한 쟁취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세렌디피티(Serendipity):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얻은 뜻밖의 발견이나 발명을 뜻하는 말. 본 칼럼에서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예측 가능한 경로를 벗어나, 의도적인 방랑과 헤맴을 자처한 인간만이 맞이할 수 있는 주체적인 우연과 뜻밖의 행운을 의미한다.
동질적 집단의 안락한 울타리를 넘어, 낯선 타인들과의 느슨한 연대로 완성되는 '약한 연결의 힘'을 상징하는 이미지. 다소 불편한 충돌을 감내하며 미지의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인간만의 특권인 '진정한 세렌디피티'의 문이 열릴 수 있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그렇다면 우리의 취향 또한, '맥락'은 던져주지만 정작 생생한 '질감'은 전해주지 못하는 알고리즘으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삶의 질감을 직접 만지고 부딪히는 과정에서만이, '진짜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확실하고도 선명한 취향을 얻게 될 터,
데이터로 환원된 취향은 한낱 매끄러운 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진짜 취향은 땀 흘려 찾아낸 심해의 보물처럼, 얼마간의 고통과 인내가 수반된 탐색의 결과물이어야만 한다는 얘기.
기계가 정제해 둔 안락함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불편함을 통과할 때에 비로소, 취향은 단순한 소비 목록을 넘어 한 인간의 견고한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교하게 짜인 가상 세계의 선들을 끊어내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타인들과 마주 앉아 나누는 역동적인 연대. 다소 낯설고 불편한 충돌 속에서도 이러한 과정에서라면, 서로의 외연이 확장되며 진짜 창조의 불꽃이 번뜩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하단)(사진출처: [기획 'WHY'] 전용 아카이브)
여기에 한 가지 제언을 더하자면, 인간에게 타인과의 연결이 필수적인데 있어 나와 취향이 똑같은 이들만 모아놓은 커뮤니티도, 알고리즘이 설계한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이 될지 모른다. 생각이 복제된 방 안에서는 취향의 진화도, 사상의 확장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가 제시한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 이론처럼, 오히려 나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낯선 이들과의 느슨한 연대가 훨씬 더 혁신적인 정보와 예기치 못한 변화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와 결이 다른 타인과의 불편한 충돌과 이질적인 마찰도 감내하다보면 어느새, 진짜 생각지도 못한 더 새로운 창조의 불꽃이 활활 타오를지 모를 터,
그럼 이제 결론이다. 내가 원할 때에만 기계를 깨우는 이 작은 주도권 회복이야말로, 사육장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가장 주체적이면서도 즉각적인 반란이 될 것이기에
우린 이러한 알고리즘의 추천을 거부할 권리를 항시 염두해야한다. "실패해도 좋으니 내가 직접 고르겠다"라는 우리 각자의 선언과 함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했듯,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자유'라는 형벌을 받은 존재이기에 실패 속에서 얻은 작은 발견 하나가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100개의 성공적인 추천보다 삶을 더 풍요로이 할 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선택의 고민'과 ‘예측 불가능함’에 더해, 트랙을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는 불편한 경험, 시스템이 분류한 통계적 샘플 되기를 거부하는 발칙한 엇박자들로 자신만의 취향 속 진짜 주인이 되어보시길.
그렇다면 이제 다시 넷플릭스나 유튜브 앞에 섰다고 가정해 보자. 오늘의 알고리즘이 권하는 1위 콘텐츠를 과감히 지나칠 수 있겠는가? 대신 가장 구석에 있는,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낯선 제목을 클릭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어떤 데이터의 총합보다도 훨씬 더 큰 자신만의 숭고한 영혼을 길잡이 삼아, 오늘 하루 기적 같은 '오류'를 감행해 보자. 이 오류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한다는, 가장 명확하고도 확실한 증거가 되어줄 테니까. [시사캐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