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정류소_02stop] 일상을 지키려던 헥토르, 불멸을 원한 아킬레우스 ㅡ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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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류소_02stop] 일상을 지키려던 헥토르, 불멸을 원한 아킬레우스 ㅡ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2편)
양태진 기자
승인 2026.09.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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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를 것 없는 인생길, 나만의 버스를 타고 내려 보는 영화 속 풍경
본질만 '정류(精溜)'해 들여다보는 영화 한 편 간편 다루기
세상이라는 전쟁터에 홀로 내세워진 이들을 위한 위로 어린 찬사, 영화 '트로이(Troy)' 下
(시사캐스트, SISACAST=양태진 기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거대한 목마(木馬)의 전설.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난공불락의 성문이 마침내 열리고, 끝없는 피를 갈구하던 그리스 대군이 썰물처럼 자취를 감춘 텅 빈 해변가. 그 적막한 백사장 위에 기괴할 만큼 거대하게 우뚝 솟은 나무 조형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성벽을 지켜낸 이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영화 <트로이(Troy, 2004)>를 본 이들이라면, 승리의 환희에 눈이 멀어 등 뒤로 엄습하는 불길한 기운은 애써 외면한 채로, 폭풍전야의 모래사장에서 그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던 트로이인들의 광경을 기억할 것이다. 비극으로 치달을 역사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우린 또다시 마른침을 삼키며 스크린 위의 잔혹한 운명을 숨죽여 목도하게 되는데,
'이 영화의 원전인 <일리아스(Ilias)>를 쓴 '호메로스(Homēros)'는 기원전 8세기경, 소아시아 이오니아(현 튀르키예 서부 해안) 출신으로 서양 문학의 새벽을 연 방랑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선 오늘날까지도 ‘호메로스 문제’라 불리는 학문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나 고대 그리스 각지를 떠돌며 구전 서사시를 읊던 음유시인(아오이도스)들의 전통을 집대성해 서양 문학의 위대한 기틀을 완성한 인물로는 평가받고 있는 지금, 그의 손끝에서 '닥틸로스 6보격'*의 웅장한 운율이 빚어져 나온 이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스>의 경우, 본래 ‘트로이(일리온)를 노래한 시’라는 뜻을 품고 총 24권으로 전해 내려왔다. 헌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십 년에 걸친 기나긴 트로이 전쟁의 전모를 담기보다, 전쟁의 마지막 해에 벌어진 단 51일간의 찰나를 집요하게 조명한다는 사실 아래, 아킬레우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그 파괴적 대가, 그리고 헥토르와의 숙명적 대결을 축으로 삼아 가혹한 운명 앞의 영웅적 실존을 탐구한데에 있어 정작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트로이 목마’의 계책이나 성의 최종 함락 장면 같은 극적 결말은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트로이>에서 구현한 그 '트로이 목마'를 상징화한 이미지 한 컷(상단)(출처:[영화_정류소] 전용 아카이브)과 목마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온 직후의 영화상 주요 장면 중 스틸컷 하나.(하단)[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이러한 침묵 속에서 영화 <트로이>는, 지극히도 인간적인 욕망과 고독, 그리고 육신의 서늘한 혈투만이 남은 약 삼천 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신화를, 그 어떤 역사적 전장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처절한 실존 드라마로 완성해 냈다.
그렇다면 이 신화 속 영웅과 거대한 국가간의 격돌이 남긴 건 무엇일까. 트로이의 왕세자 '헥토르'를 쓰러뜨린 채 복수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듯했던 '아킬레우스'. 헌데 그날 밤, 그의 막사로 숨어든 한 노인이 있었건만 그는 바로 트로이의 군주이자 아들을 잃고난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 분)이었다.
* 닥틸로스 6보격(Dactylic Hexameter): '긴 음절 하나와 짧은 음절 둘'로 이루어진 3박자 리듬 단위가 한 행에 6번 반복되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의 대표적 낭송 운율. '일리아스'는 원래 문자가 아닌 소리로 낭송되던 구전 서사시였기에, 음유시인이 운율을 타며 긴 이야기를 쉽게 외우고 청중에게 리듬감 있는 웅장함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정형시 형식이 차용되었다.
일상을 지키려던 헥토르의 방패도, 홀로 세상에 맞서 불멸을 갈망했던 아킬레우스의 칼날도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증명하려 했던 숭고한 분투였던 것을. 아침이면 방패와 칼을 챙겨 들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출근해 저녁이면 온갖 상처와 피로를 짊어진 채 홀로 불 꺼진 방으로 돌아오는 1인의 삶이란, 어쩌면 모두 저마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헥토르이자,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내보이고 그 신뢰를 증명하려 고군분투하는 아킬레우스로 매일을 버텨내고 있는건 아닐지. 이를 상징화하듯 아폴로 신전 앞, 그리고 '헥토르(에릭 바나 분)'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아킬레우스(브래드 피트 분)'의 영화 속 주요 장면들 스틸컷.[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영화 밖 숨은 1인치] 어찌됐든 이 영화가 독보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배역과 혼연일체를 이룬 배우들의 묵직한 존재감과 그에 따른 치열했던 현장 에피소드에 있기도 하다. 황금빛 갑주를 두른 '아킬레우스' 역의 '브래드 피트'는 이 작품을 위해 수개월간 육체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반신반인(半神半人)의 날렵하고 치명적인 검술 액션을 스크린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헌데 이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촬영 도중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기막힌 운명적 부상을 겪으며 투혼을 불살랐다는 후문. 무거운 어깨로 성벽을 나섰던 트로이의 총사령관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 역시 절제된 눈빛과 품격으로 '브래드 피트'의 날카로운 광기와 완벽한 대척점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실제 두 배우가 맞대결 장면에서 대역(스턴트)은 일절 쓰지 않기로 합의, 가벼운 타격을 입힐 시엔 50달러, 큰 타격을 입힐 시 100달러 라는 벌금을 물기로 했을 정도로 혼신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왕관도, 그 높은 권위도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제 자식을 도륙한 원수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시신만이라도 돌려달라 청하는 그 백발이 성성한 노인 앞에 무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난생 처음 칼을 내려놓고 함께 무너져 내린다.
적장의 죽음 앞에 환호하는 승자도, 비굴하게 구걸하는 패자도 그곳에는 없었던 것. 단지 비좁은 막사 안을 채운 건 삶이라는 잔혹한 전장에서 저마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만, 연약한 두 인간의 지독한 슬픔만이 잔존할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처지와 결핍 속에서 어떻게든 제 몫의 안위를 지키려 발버둥 치던 ‘필멸자들의 처절한 생존기’가 가감 없이 녹아있기에 이 영화 <트로이>는 물론이고 원전인 <일리아스>는, 영웅들의 무용담을 넘어 3천 년을 살아남은 불멸의 지침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저마다의 자리에서 치열했던 그들의 고투가, 끝내 잿더미라는 파국으로 귀결되고 만 결정적 변곡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인 왕(지도부)의 치명적인 ‘눈멂’이 시작점이었다. 목마의 기만과 위험성을 직감하고 경고하던 현자들의 목소리가 존재했음에도, 오랜 대치 끝에 찾아온 거짓 평화에 도취된 권력은 내부의 자정 작용과 엄정한 검증 시스템을 제 손으로 짓밟은 것이었다. 각자의 고통을 감내하며 성벽을 지켜내던 무수한 이들의 헌신은,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상식을 외면하고 오판을 고집한 리더십의 독선 앞에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었다. - 해당 이미지는 트로이가 함락되기 전의 칼럼 본문 내용에 따른 것으로 깊은 밤,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와 아들의 시신을 애걸하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피터 오툴 분)(상단 및 중간), 그리고 자신의 성 밖으로 몰려드는 엄청난 숫자의 적군과 불멸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참전을 직시한 '프리아모스'의 모습 스틸컷.(하단)[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 걷어낸 신화의 장막 뒤엔, 이와 같이 먹먹한 연민의 순간들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너와 내가 맞부딪히며 피를 흘렸다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시간 앞에서 그저 부서지기 쉬운 한 줌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자각. 영화는 그것을 화해 아닌 화해를 통해 전쟁의 승패보다도 더 묵직한, 인간 존엄의 무게를 스크린 위에 새겨놓고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목마의 기만극이 완성되기까지, 영화 <트로이>가 집요하게 비추는 것은 결코 승리와 패배라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다. 그 견고한 트로이의 성벽 안팎에는 저마다의 안위와 신념, 그리고 뼈아픈 고충을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지극히도 입체적인 인간 군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에,
목마의 뱃속에 도사린 파멸의 칼날(숨어있던 적군 일부)을 직시하지 못한 채 빗장을 풀어버린 이 트로이의 비극을 교훈삼아 지금 우리의 정치, 사회 분야 또한 그 어느때 보다도 뼈아픈 자기 성찰을 통한 정상화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국가의 중책을 짊어질 공직자들을 가려내는 검증의 문턱마다, 연이어 불거지는 온갖 비리와 자격 미달의 흠결들. 그리고 이를 향해 쏟아지는 민심의 우려를 아전인수격 진영 논리로 덮으려는 권력의 태도는 트로이 목마를 성문 안으로 거리낌없이 들여온 그 오만과도 묘하게 닮아 있다. 다시 말해 각자 묵묵히 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높이를 배반한 인사나 정책은, 단순한 실책을 넘어 국정 전반의 동력을 갉아먹고 공동체의 신뢰라는 가장 단단한 방벽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결국 고전이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준엄한 지침은,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엄정함’과 ‘자신의 주변, 특히 내부의 경고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겸허함’이 아닐는지. 개개인이 품은 욕망과 고뇌를 헤아리는 포용의 시선 또한 모두의 덕목이자, 지도자의 크나큰 책무일지언정, 공적인 임무와 시스템을 다루는 자리에서만큼은 자신만의 안위와 사사로운 인연, 그리고 진영의 유불리가 결코 원칙을 앞설 수 없다는 그런 냉엄한 진실 말이다. 이러한 진리가 수천 년 전에도 증명되고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서사시 <일리아스>를 영화화한 <트로이> 속 전쟁 당시의 주요 장면들 모음.[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이들의 엇갈린 시선을 촘촘하게 엮어내며 약 3천 년 전의 고대 전장을,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선 복잡다단한 현실의 축소판으로서 치환해 놓고 있는 것이었다.
비극의 도화선이 된 트로이의 둘째 왕자 '파리스'(올랜도 블룸 분)를 그저 철없는 사랑에 눈먼 한량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기엔 너무도 유약했던 이 청년은, 자신의 충동적인 선택이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극심한 자책과 공포에 시달리건만,
영화 <트로이>가 3천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건넨 위로는 '끝끝내 이겨 살아남으라'는 단순한 독려가 아니다. 매일 마주치는 타인들의 날 선 표정 뒤에도, 나와 똑같이 무거운 짐을 진 채 남몰래 눈물을 삼키는 고독한 실존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시선, 그러한 '확장된 시선'을 포괄하고 있는 것을. (그렇다고 임계점을 넘은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인한 스스로의 고충까지 다 헤아려줄 필요는 없다.) 허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린, 팍팍한 일상 속, 내 앞을 가로막는 타인들을 쉽게 원망하곤 한다.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란 밖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버거운 법이거늘. 그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적장의 슬픔에 무릎을 꿇었던 아킬레우스처럼, 우리 또한 타인의 서투름과 불안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번민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불필요한 증오와 고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린 이 웅장한 서사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늘 하루 과연, 내 곁을 스쳐 간 무수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고뇌에 얼마나 너그러웠는가. 그리고 어떤 욕망의 깃발을 꽂기 위해,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를. 그것은 바로, 내가 쓰러지면 누구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는 서늘한 자각과 함께, 이름값을 증명해 내기 위한 자립심이라는 눈부신 갑옷을 입은 채로, 나 자신을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해나가는 것은 아닐는지. 여기서 비롯되는 내면의 온기와 소중한 가치들 또한 무엇보다도 꼭 지켜내야 할 것들이기에,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우리에게 영화 <트로이>는 일갈해주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의 삶을 지켜내려 애쓰는 모든 필멸자들의 고투, 그 자체 만큼 더 눈부시게 숭고한 것도 없다라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으나 어찌됐건 결국 트로이 전쟁을 촉발시키고만 대표적 인물, '파리스' 왕자(올랜도 블룸 분)의 영화 속 스틸컷 모음. 상단 우측의 여인 또한 스파르타의 왕비를 넘어 왕자 파리스와의 금지된 사랑을 택하며 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불러들여 트로이 제국을 파멸의 잿더미로 몰아넣은 비극의 도화선, '헬레네'(다이앤 크루거 분)의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스틸컷이다.[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형의 완벽한 그림자에 가려져 비겁자라는 낙인을 마지막까지 피하고자, 떨리는 손으로 아킬리스를 향해 활시위를 당겨야 했던 그의 번민 속 애틋한 용기는, 가혹한 현실의 파도 앞에 제 깜냥 만큼은 넘어서보려는 미숙한 우리네 청춘의 서툰 자화상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성벽 너머 그리스 진영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리스 최고의 지략가 '오디세우스'(숀 빈 분)는 왜 그토록 고향 이타카의 흙냄새를 그리워하며 깊은 회의(懷疑)에 잠겼던가.
그는 탐욕에 눈먼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 분)의 패권주의와 통제 불능인 '아킬레우스'의 오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며, 이 명분 없는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처절한 잔꾀를 쥐어짜 내야 했던 것을.
트로이가 잿더미로 스러진 자리, 피비린내 나는 혈투의 칼날을 거두고 나면 또 다른 숙명적인 여정이 고개를 쳐든다. 바로 전쟁이라는 거대한 광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가야 할 길, '고향집으로 향하는 길'인 것을. 트로이 목마를 세워 지옥 같은 공방전에 종지부를 찍었던 지략가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또 다른 10년의 방랑기이자, 고대 그리스 서사시의 또 다른 기둥 <오디세이아>.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손끝에서 새롭게 스크린으로 부활한 <오디세이>가 전 세계 관객의 숨을 멎게 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밖으로 향하던 영웅주의의 칼끝을 거두고, 인간 내면의 심연과 마치 시간을 거슬러 기필코 돌아가야만 하는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그 처절한 귀환의 여정이란, 영화 <트로이>의 거친 숨고르기 끝에 반드시 마주해야 할 필연적 다음 정거장과도 같은 것을. 이러한 고전의 힘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짙어지고 있는 지금, 컴퓨터 그래픽의 현란한 눈속임이 아닌, 모래 먼지와 쇳소리가 부딪히는 인간 육체의 처절한 마찰을 느끼고 싶다라면, 그리고 매일 아침 세상이라는 링 위에 홀로 서서 신발 끈을 묶는 당신의 고독에 묵직한 위로와 불꽃 같은 배짱을 채워 넣고 싶다라면, 지금 바로 영화 <트로이>의 성문과 <오디세이>의 극장 앞으로 다가설 것을 권한다. '아킬레우스'가 방패를 든 채 전장을 향해 내딛는 첫 걸음과 집으로 향한 '오디세우스'의 떨리는 발걸음 속에서, 오늘을 살아갈 또 하나의 단단한 무기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상위의 이미지는 본문과 직결된 영화 <트로이> 속 지략가 '오디세우스'(숀 빈 분)의 모습(상단)과 탐욕으로 점철된 패권주의자 '아가멤논'의 모습 스틸컷.(하단)[출처: 영화 <트로이(Troy, 2004)> 공식 보도 스틸컷 / 배급: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s. Pictures) / 문화 비평 및 해설 인용]
결국 그가 고안해 낸 기만책 '트로이 목마'는 위대한 승리의 징표이기 이전에, 어떻게든 살아서 제 집으로 돌아가고자 몸부림쳤던 한 생활인(?)의 절박한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었다.
늙은 국왕 '프리아모스'(피터 오툴 분)의 고뇌는 또 어떠한가. 신들의 가호와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믿었던 노회한 군주는 나라의 존망과 자식의 목숨이 저울질당하는 파국의 기로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마침내 모든 체면과 권위를 내던지고 혈혈단신 적장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숨어든 그 먹먹한 순간, 스크린을 지배하는 것은 영웅의 무용담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파멸 앞에서도 끝끝내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사랑을 지켜내려 발버둥 치는, 한 인간의 거룩한 슬픔인 것이었다.
작은 화살촉 하나가 관통한 것은 '아킬레우스'라는 신화적 영웅의 육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을 가장하는 인간의 교만을 향한 죽비(竹篦)이자, 매 순간 스스로의 한계와 결핍을 겸허히 돌아보라는 시대를 초월한 잠언인 것을. 세상이라는 거친 전장에서 각자의 무기를 들고 홀로 분투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저마다 치열하게 성벽을 쌓고 갑옷을 덧대며 스스로를 무장하지만, 그 누구에게나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 혹은 예기치 못한 작은 방심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저마다의 '아킬레스건'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나의 취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겸허히 직시하는 것, 그리고 나와 마주 선 타인의 치명적인 상처 만큼은 함부로 겨누지 않는 성숙함이야말로 이 비정한 전장에서 영혼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허나 이와는 상관없다는 듯, 불타 무너져 내리는 트로이 궁정의 한복판에서,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활시위를 당긴 파리스 왕자의 상징적 모습(상단)과 적장의 묵직한 창도, 대군의 칼날도 아닌 단 한 발의 화살이 무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급소인 '발뒤꿈치'를 꿰뚫으며 신화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적 종말을 상징화한 이미지.(하단)(출처:[영화_정류소] 전용 아카이브) ※ 본 이미지는 영화 <트로이(2004)>의 결말부에서 가장 상징적인 운명의 순간인, 영웅의 불멸성과 인간적 유한함이 교차하는 아킬레우스의 비극을 시각화한 본 칼럼진의 수묵 빈티지 질감의 상징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영화의 막바지, 난공불락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 아비규환의 트로이 궁정 한복판에서, 우린 신화가 남긴 가장 상징적인 파멸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저 비겁자라 손가락질받던 유약한 왕자 '파리스'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쏘아 올린 화살 한 발, 그리고 그것이 훗날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유일한 급소,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었다.
어머니 '테티스'가 갓난아이였던 '아킬레우스'를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저승의 스틱스 강물에 담글 때, 손으로 쥐고 있느라 미처 물에 젖지 못했던 발목, 그곳에 유일한 인간적 결함이 와버린 '아킬레스건'의 신화적 탄생을 상징화한 이미지.(상단) 신화적 판타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세상 속 완전무결해 보이는 절대 강자로서의 성인이 된 '아킬레우스'에게 남겨진 것은 스스로 품고 있는 연약한 틈새, 그 아킬레스건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 한 컷.(하단)(출처:[영화_정류소] 전용 아카이브) ※ 해당 이미지는 아킬레스건 설화의 원형을 조망하여 그 신화 이미지를 재해석한 본 칼럼진의 상징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이는 곧,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갓난아이였던 아킬레우스를 불사(不死)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저승의 스틱스 강물에 담글 때 손으로 쥐고 있느라 미처 물에 젖지 못했던 유일한 인간적 결함. 그리고 오늘날 치명적 약점을 뜻하는 의학용어이자 관용구가 된 '아킬레스건(Achilles' heel)'의 탄생 순간인 것이었다.
아무리 완전무결해 보이는 절대 강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제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연약한 틈새를 품고 살아가는 것을.
자신이 무적이라는 오만에 취해 그 미세한 결핍 하나를 방심한 순간, 영웅조차 가장 작고 초라한 화살 한 발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그런 서늘한 경고인 셈이었다.
이 영화가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 특히 문을 닫고 들어앉은 각자의 방 안에서 고요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현대 1인 가구의 심장 또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거대한 조직의 논리나 타인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의 궤적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라는 거친 백사장에 홀로 상륙한 '아킬레우스'와 같이,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내는 1인 가구의 서늘한 실존적 모습이 어느 정도는 닮아 있다라는 것. 또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상의 피로감 역시 성벽 위에서 홀로 번뇌하던 헥토르의 고독한 어깨를 고스란히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허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성취를 좇느라 정작 곁에 머무는 사소한 온기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일상의 관성에 젖어 내 안의 숭고한 존엄을 증명할 결기마저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이런 부분은 놓치지 않도록 세심히 돌아봐야 할 것이다. 상위의 이미지는 본 칼럼진이 이 내용을 어느 정도 함축시킨 상징적 일러스트레이션임.(출처:[영화_정류소] 전용 아카이브)
원전 <일리아스>가 쓰이고 영화 <트로이>가 이를 다시 불러낸 본질적인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거대한 서사는 '누가 더 용맹했는가'를 가리는 영웅의 찬가가 아니다.
제각기 다른 처지와 결핍 속에서, 저마다의 안위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가혹한 운명의 대가를 오롯이 짊어져야 했던 이들의 집단 초상화인 것을.
저마다의 입장에선 그 누구도 온전한 악인이 아니었으나, 수많은 나름의 정당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순간, 삶은 비극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낳고 만다는 서늘한 진실. 바로 이러한 진리를 이 영화는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신화의 종막(終幕)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몫으로 짊어진 삶의 전장에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깃발 하나를 가슴에 품은 채 하루를 버텨내는 고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찬란한 서사시임을 나직이 일깨울 뿐. 그럼 오늘 밤, 세상이라는 거대한 성벽 앞에서 외로운 결투를 마친 당신의 고단한 방에, 이 뜨겁고도 묵직한 고전의 숨결을 조용히 초대해 보길 권한다. 헥토르의 무너진 일상과 아킬레우스가 거머쥔 비정한 불멸의 끝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결정적 물음을 되돌려줄 것이기에, 이를 오래도록 곱씹어 보는 것도 나름의 좋은 선택이 될 것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가."
그럼 오늘, 세상이라는 전선(戰線)에서 저마다의 방패를 챙겨 들고 고군분투했을 당신의 작은 식탁 위에 이 영화의 묵직한 온기가 전해지기를.
비록 삶이란, 권력자들의 오만과 어지러운 정쟁의 소음, 그리고 우릴 지치게 하는 것들로부터 버텨내야 할 외로운 싸움일지라도, 그 결핍과 고충을 묵묵히 견디며 정직하게 일상을 지켜내는 우리들이야말로,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을 진정한 영웅들인 것이기에,
그 처절한 분투의 가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경의를 표하는 또 다른 고독한 영혼들이 존재하는 한, 트로이의 불길이 잦아든 저 수평선 너머로 그저 묵묵히, 또다른 영화로 향할 다음 버스를 기다려도 좋을 밤이다.[시사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