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캐스트, SISACAST= 이병진 기자)
페라리에서 엔진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루체를 이해하려면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다. 굉음을 내는 엔진과 빠르게 치솟는 회전수, 변속 때마다 전해지는 기계적인 감각은 오랫동안 페라리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언어였다. 순수 전기차 시대에는 그 언어를 상당 부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페라리 최초의 순수 전기 스포츠카 루체는 단순히 새로운 동력원을 얹은 신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페라리는 기존 자동차의 전기차 버전을 만드는 대신 처음부터 전동화를 전제로 새로운 차를 만들었다. 네 바퀴를 각각 담당하는 전기모터와 대용량 배터리, 새로운 차체와 서스펜션을 개발했고 실내 역시 전기차 시대에 맞춰 다시 설계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페라리코리아는 지난 8월 루체를 국내에서 처음 공개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공동 개발한 차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역시 루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전동화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페라리가 선택한 방법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페라리다움을 새로운 기술로 옮겨놓는 일이었다.
전기차로 옮겨간 페라리의 감각
루체의 핵심은 전기차라는 사실보다 페라리가 전기차를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있다. 네 바퀴에는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전기모터가 배치된다. 합산 최고출력은 1050마력에 이르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하는 데 2.5초가 걸린다.
숫자만 보면 전기 슈퍼카 시대에 그리 낯선 영역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 개의 모터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모터를 독립적으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노면과 주행 상황에 따라 네 바퀴에 전달하는 힘을 세밀하게 조율할 수 있다. 전기모터의 즉각적인 반응을 단순한 직선 가속에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코너 진입과 탈출, 차체 자세까지 적극적으로 다루겠다는 접근이다.
루체가 전기차이면서도 페라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엔진의 감각은 사라졌지만 운전자와 자동차 사이의 긴밀한 교감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기모터가 가진 빠른 반응과 정교한 제어를 새로운 운전 감각의 재료로 삼았다.
성능과 일상을 아우른 구성
배터리 용량은 122킬로와트시다. 네 개의 전기모터와 대용량 배터리를 사용하면서도 루체는 전형적인 2인승 슈퍼카의 틀에 머물지 않는다. 네 개의 문과 다섯 개의 좌석을 갖췄고 트렁크 공간도 597리터에 이른다. 가족과 함께 탈 수 있는 실용성을 페라리의 고성능 전기차 안에 끌어들인 셈이다.
이런 구성은 루체의 성격을 꽤 명확하게 보여준다. 극단적인 성능만을 위해 일상의 편의성을 희생하는 차가 아니라 강력한 성능과 장거리 이동, 넉넉한 공간을 한 차 안에 담으려 했다. 전동화가 페라리의 성능을 바꾸는 동시에 자동차의 쓰임새까지 넓힌 것이다.
주행 감각을 다루는 방식도 세밀하다. 최신 능동형 서스펜션을 적용해 노면에서 올라오는 충격과 차체 움직임을 능동적으로 제어한다. 일상에서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빠른 주행에서는 차체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이 목표다. 전기차 특유의 큰 배터리와 무게를 힘으로만 억누르기보다 섀시 기술로 다루려는 접근에 가깝다.
한국 기술을 품은 디지털 공간
실내는 루체가 기존 페라리와 가장 선명하게 달라지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삼성디스플레이와 협업해 개발한 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가 운전석 계기판과 중앙 제어부, 뒷좌석 제어부에 적용됐다.
특히 계기판은 12.9인치와 12인치 패널을 겹친 다층 구조가 특징이다. 여러 층의 화면과 대형 절개부를 이용해 평면 화면에서 보기 어려웠던 입체감을 구현했다. 디지털 화면을 단순히 크게 만드는 대신 정보가 떠 있는 듯한 깊이를 표현한 것이 핵심이다.
흥미로운 점은 페라리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실내를 거대한 화면으로 채우는 유행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필요한 정보는 디지털로 명확하게 보여주되 조작과 공간의 구성에는 페라리 특유의 기계적인 감각을 남겼다. 첨단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운전자가 자동차와 교감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루체의 성격과도 잘 맞는다.
전동화가 넓힌 새로운 페라리
루체가 흥미로운 이유는 1050마력이라는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페라리가 전기차 시대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네 개의 독립 전기모터와 대용량 배터리는 새로운 성능을 만들고, 넉넉한 시트와 적재 공간은 페라리를 사용하는 범위를 넓힌다. 여기에 능동형 서스펜션과 새로운 디지털 환경까지 더했다. 기존의 페라리를 전기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전기차 시대에 필요한 페라리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배기음과 엔진 회전수로 감정을 자극했던 페라리와 루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전기차가 그 경험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루체가 선택한 길은 전기모터의 즉각적인 반응과 정교한 차체 제어, 새로운 공간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종류의 감각을 만드는 것이다.
전기 시대의 새로운 페라리
페라리에게 전동화는 꽤 어려운 숙제다. 빠른 전기차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에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전기차가 많다. 페라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빠른 전기차가 아니라 운전했을 때 분명히 페라리라고 느낄 수 있는 전기차였다.
루체는 그 답을 찾기 위한 첫 결과물이다. 엔진 대신 네 개의 모터가 들어갔고 계기판에는 한국의 디스플레이 기술이 자리 잡았다. 네 개의 문과 다섯 개의 좌석까지 갖추면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페라리의 모습에서도 한 걸음 벗어났다.
그런데도 지향점은 의외로 익숙하다. 기술보다 운전자의 감각을 앞세우고 성능만큼 자동차를 경험하는 과정에 공을 들인다. 결국 루체가 증명해야 할 것도 하나다. 엔진이 없어도 페라리는 여전히 페라리일 수 있는가? 루체는 그 오래된 질문에 페라리가 처음 내놓은 전기 시대의 대답이다. [시사캐스트]

